[모종린의 로컬 브랜딩] 헤이리는 어떻게 골목상권을 만들었나, 중소기업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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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6.08.19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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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상권은 자연발생적? 계획적 조성의 모델 제시

로컬 브랜드와 지역 상권 정책 전문가인 모종린 연세대학교 교수가 전국 곳곳의 로컬 상권을 찾아 탄생과 진화의 과정을 소개한다. 지역의 공간과 문화자산, 로컬 크리에이터의 다양한 시도 등이 어떻게 새로운 상권을 만들어냈는지 살펴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끈 성공 요인과 정책적 시사점도 함께 살펴본다.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전경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전경

계획해서 골목상권을 만들 수 있을까

골목상권은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다. 오래된 주거지나 시장 주변에 작은 가게가 하나둘 들어오고, 창업자와 방문객이 늘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상권으로 성장한다. 서울의 연남동과 성수동, 경주의 황리단길이 대표적이다. 기존 건축물에 새로운 상점과 콘텐츠가 들어오고, 그것이 다시 새로운 창업자를 끌어들이면서 상권이 확장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계획해서 골목상권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까. 모든 지역에 골목상권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신도시나 관광단지, 상권 기반이 약한 지역에서는 일정한 계획과 개입을 통해 새로운 상권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은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중요한 사례다. 헤이리는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골목상권이 아니다.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마을을 계획하고 건물을 짓고 콘텐츠를 채워 만든 문화지구다. 지금 지역마다 추진하는 문화지구, 로컬상권, 크리에이터 타운을 1990년대 후반부터 실험한 셈이다.

문화예술인이 직접 만든 마을

헤이리의 출발은 1997년이다. 문화예술인들이 파주 통일동산에 모여 창작과 전시, 공연, 출판, 생활이 함께 이루어지는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부나 대형 개발회사가 주도한 신도시가 아니라 미술가, 음악가, 건축가, 영화인, 출판인 등 문화예술인들이 직접 토지를 매입하고 마을의 원칙을 정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주거단지가 아니라 문화 생산과 소비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간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예술가가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며, 방문객과 만나는 구조였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주거·창작·상업·문화가 결합된 크리에이터 타운이다.

헤이리가 20년 넘게 수도권의 대표적인 문화 목적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헤이리는 지금도 건축, 미술, 음악, 책, 카페를 경험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간다. 계획적으로 만든 문화지구가 하나의 장소 브랜드로 정착했다는 것만으로도 헤이리는 성공 사례로 평가할 만하다.

 

콘셉트와 건축이 상권을 만들다

헤이리에서 배울 첫번째 교훈은 분명한 콘셉트다. 헤이리는 처음부터 문화예술마을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상업지구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이라는 기준으로 사람과 공간, 콘텐츠를 조직했다. 상권을 계획해서 만들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이 왜 이곳에 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헤이리는 그 답을 문화예술에서 찾았다.

두번째는 건축이다. 헤이리는 모든 건물을 3층 이하로 제한하고 경사지와 생태환경을 최대한 보존했다. 획일적인 건축을 피하고 개별 건축가의 창의성을 존중했다.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하면서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건축 전시장처럼 만들어졌다. 방문객에게 건축 자체가 콘텐츠가 된 것이다.

이는 상권활성화 사업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는 흔히 상권을 활성화한다고 하면 어떤 점포를 입점시킬 것인가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헤이리는 상권의 경쟁력이 점포 내부의 콘텐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리와 건축이 독특해야 좋은 창업자가 들어오고, 그 공간에서 만들어진 콘텐츠가 다시 장소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건축환경과 콘텐츠가 서로를 끌어올리는 구조가 필요한 것이다.

 

크리에이터가 콘텐츠를 생산하다

세번째 교훈은 크리에이터의 집적이다. 헤이리는 완성된 상가를 먼저 건설하고 운영자를 모집한 곳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이 먼저 모였고 그들의 활동이 자연스럽게 콘텐츠가 됐다. 미술관, 갤러리, 공연장, 출판공간, 스튜디오, 카페 등이 들어서면서 서로 다른 문화 활동이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었다.

황인용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와 한길 북하우스 같은 공간은 헤이리를 대표하는 앵커가 됐다. 이들의 특징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방문객은 상품 하나를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만든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찾아간다.

네번째 교훈은 콘텐츠의 다양성이다. 헤이리는 하나의 업종에 의존하지 않는다. 미술, 음악, 책, 영화, 건축, 공예, 음식 등 서로 다른 콘텐츠가 공존한다. 방문객은 하나의 목적지를 찾아왔다가 다른 공간을 발견한다. 특정 상품을 사기 위해 방문하는 일반적인 상업시설과 달리 마을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 방문 목적이 된다. 이것이 헤이리를 일반적인 쇼핑단지와 구별하는 힘이다.

상권을 지탱하는 공동체

다섯번째 교훈은 공동체다. 헤이리는 문화예술인들이 토지를 공동으로 매입하고 마을의 원칙을 함께 정하면서 출발했다. 갈대광장과 커뮤니티하우스는 주민들이 만나고 행사를 열고 공동의 문제를 논의하는 중심 공간으로 발전했다.

상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개별 점포의 경쟁력만으로 부족하다. 상인과 창작자가 지역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함께 관리해야 한다. 자연발생적인 골목상권에서는 이런 공동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지만, 계획적으로 만드는 상권에서는 처음부터 공동체를 설계해야 한다. 헤이리가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서 활동할 사람들의 관계까지 함께 만들려고 했다는 데 있다.

결국 헤이리의 성공 원리는 콘셉트-건축-크리에이터-콘텐츠-커뮤니티의 결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대형 쇼핑몰이 건물을 먼저 만들고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방식이라면 헤이리는 사람과 콘셉트에서 출발해 건축과 콘텐츠를 축적했다. 상권을 하나의 부동산 개발사업이 아니라 문화생태계 조성사업으로 접근한 것이다.

 

인위적으로 상권을 만들어야 한다면

헤이리의 경험은 오늘날 지역 상권 정책에 특히 중요하다. 모든 골목상권이 성수동이나 황리단길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다. 신도시, 관광지, 쇠퇴한 원도심처럼 기존 상권 기반이 약한 지역에서는 일정 정도 계획적인 상권 조성이 필요하다.

먼저 지역이 어떤 장소가 될 것인지 콘셉트를 정하고, 그 콘셉트를 구현할 건축과 공간을 만들고, 이를 운영할 크리에이터를 모아야 한다. 이들이 독립적인 브랜드와 콘텐츠를 만들고, 앵커 공간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헤이리는 인위적인 상권 조성이 결국 상점의 집적이 아니라 생태계의 조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 보여줬다.

아쉬운 점도 있다. 헤이리는 특정 중심가로를 만들기보다 시설을 분산 배치했고, 건물마다 주차공간을 확보하면서 상점이 연속되는 보행가로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주민 공동체의 중심은 형성됐지만 방문객이 자연스럽게 모여 걷는 상업적 중심은 분명하지 않다. 계획적인 골목상권을 새로 만든다면 헤이리의 문화적·건축적 장점을 계승하면서 중심가로와 보행 동선을 더 치밀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헤이리의 의미는 분명하다. 골목상권은 반드시 자연발생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역 상황에 따라 인위적인 조성이 필요하다면 한국에는 이미 참고할 경험이 있다. 문화예술인을 모으고, 건축을 설계하고, 콘텐츠와 공동체를 축적해 하나의 문화지구형 골목상권을 만들어낸 헤이리다. 새로운 골목상권을 만들려는 지역이라면 헤이리가 축적한 경험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사진출처 : 헤이리예술마을 홈페이지

- 글 :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